[맛의 기억] 튀김이 만들어준 인연
“지구상 어느 한 곳에 바늘 하나를 딱 꽂고, 저 하늘꼭대기에서 밀씨를 떨어뜨렸을 때. 그 밀씨 하나가 나풀나풀 날아서 위에서 말한 바로 그 바늘 위에 딱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너희가 이곳, 지구상의 하고많은 나라 중에서 대한민국, 중에서도 서울, 00동 안에서도 Y고등학교 그중에서도 2학년 그걸 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 지금 너희들 앞에, 옆에 앉아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또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중에서 이병헌 대사다.
나에게도 인연 중에 아름다운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을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게 여러 가지다. 그게 누군가에겐 어떤 장소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어떤 물건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어떤 음식이다. 나 같은 경우엔 아름다운 인연에 대한 추억으로 이끌어주는 ‘타임캡슐’ 역할하는 게 바로 튀김이다. 특히 투명한 당면에 까만색 김을 입힌 튀김, 적당량의 간장(청량고추가 들어간) 한 입으로 베어 물면 김의 옷이 벗겨지며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나를 이끌어 준다.
입시가 끝난 후 학교에서 시간이 많이 남았다. 지루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해볼까 생각했다. 오래전 kbs프로그램 중 ‘TV는 사랑을 싣고’가 유명했다고 한다. 유명스타가 나와 ‘첫사랑’을 찾거나 ‘선생님’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도 거기에 착안해 첫사랑을 찾아볼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정말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첫사랑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당시 전학을 온 터라 학교는 모든 것이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첫사랑 짝궁이었던 P는 어색하고 낯설어하는 나에게 친절과 배려로 잘 적응할 수 있게 해 줬다. 하지만 P는 한 학기를 마치고 반 친구들에게도 내게도 말없이 전학을 갔다. 가까운 P의 절친조차도 어디로 이사하게 됐는지 몰랐었다. 정말 아쉬웠다. 그 후로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그 프로그램 안에는 사람을 찾는 방법이 가끔 중간에 찾지 못하면 직접 경찰서에 가는 게 나왔다고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도 따라 하기로 결정하고 **경찰서 찾아 갔다. 정문엔 전경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전경이 지킨다는 걸 나중에야 전경으로 복무하면서 알게 됐다. 지금은 사라졌다는데 전경에게 물었다. “사람 좀 찾으려 왔다.” 전경이 “경찰서에선 사람을 찾을 없다”라고 말하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앞에 있는 **파출소로 가보세요”라고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실 경찰서에 가 본 적이 없어서 정말 심하게 떨렸다. 갑자기 든 생각이 사람 찾는 이유를 분명히 말해야 경찰관이 이야기를 들어주겠거니 생각하고 거짓말(?!)을 생각해 냈다.
그 내용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가다가 버스 안에서 30만원 가량을 잃어버렸었는데 P가 찾아주고 가버려 이름과 나이만 안다고. 정말 얼토당토않는 얘기인데. 그래도 P를 찾고 싶은 마음에 다시 ** 파출소로 들어갔다. 거기엔 경찰관 두 분이 계셨다. 전후 사정을 말했다. 그랬더니 “무얼 도와드릴까요.”말을 건넸던 경찰관이 미소 지으며 “그분의 주소를 알 수는 있지만 개인정보니 함부로 알려드릴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땐 내가 미쳤을까?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한 번만 더 시도해 보자는 생각으로 다른 파출소로 갔다. 소방서 근처에 있는 ** 파출소. 한 의경(나중에 안 사실) 있었다. 앞에 한번 경험이 있다 보니 거짓말을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데 의경이 하는 말이 “이름과 나이를 알고 있으니 주소를 알 수 있다”라고 했다. 그 의경은 내가 준 쪽지를 보고 한참 키보드를 뭔가 누르더니 하는 말이 “찾았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가 18명이 있다”는 거였다. 그 순간 경찰관 두 명이 들어오더니 그 의경에게 하는 말이 “이 분 무슨 일로 왔느냐”했더니 갑자기 화를 냈다. 그러더니 경찰관 중에 한 분이 “그냥 돌아가세요”라고 말했다. 전 파출소에서 들었던 “개인정보를 함부로 알려 드릴 수 없다”라고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누군가 말하지 않았는가? 첫사랑은 찾지 말고 기억 속으로 남겨두라고 말이다. 실망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2년 후 , 5월 중순 화장한 봄날 시장입구에 있는 4평 남짓 되는 튀김집에서 P를 만났다. 사실 난 튀김이 소화가 안 돼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이 튀김집은 콜라를 서비스 주는 게 아닌가? 콜라가 느끼함을 잡아주고 소화를 잘 되게 하는 것 같았다. 먹어도 속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웃는 표정의 주인아저씨가 보통 4천 원 정도 주문하면 훨씬 많이 주셔서 자주 오곤 했다. 돈이 없고 배가 고플 땐 최고였다.
P는 나와 친한 동아리 여선배와 튀김을 먹고 있었다. 학과 동기와 튀김을 먹으러 들어갔다. 테이블이 고작 네 개에서 다섯 개 정도가 있었다. 선배와 난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반면 P는 등지고 앉아 있어 나를 바로 볼 수 없었다. 선배가 “월요일엔 강의가 빨리 끝났네. 집이 이쪽 방향이었어?” 말을 건넸다. 그 순간 긴 검정머리를 한 P도 뒤돌아 봤다. 선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드디어 찾으려고 했던 P가 아닌가.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마구 뛰어댔다. 그냥 미친 사람처럼 계속 웃음이 나오고 선배가 “너 뭐 잘못 먹었니?”라고 했다. “아니오.” 함께 온 동기도 “미**”라고 했다. 속으로 네가 내 마음을 알겠니? P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걸까? 알아보고도 모른 척한 걸까?
P에게 말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선배가 “합석할까”라고 말했다. P와 말하고 싶던 차에 “그래요.”라고. 동기 녀석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덥석 자리를 옮겼다. 동기도 별수 없이 따라 앉았다. 사실 난 재수를 했던 터라 나이는 같은데 동아리 선배로 꼬박꼬박 대했다. 동아리 선배가 P의 이름을 말하려고 할 때 내가 먼저 이름을 말했다. 본인을 어떻게 아느냐는 눈빛을 하는 게 아닌가? P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P을 보니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초등학교 친구였다고 말했다. 정말 모르는 게 아닌가? 조금 실망했다. 내가 그리도 존재감이 없었는지. 동아리 선배가 얘기하다가 먼저 집에 가봐야 한다고 해서 P와 함께 나갔고 난 동기에게 첫사랑 P 얘기를 다 털어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아리 선배에 전화했다. P가 첫사랑이었고 고3 때 경찰서와 파출소에 간 얘기도 했다. 사귀는 남자친구는 없다고 했다. 한번 잘해보라고 했다. 선배는 P의 자랑을 늘어놓는 게 아닌가. 리더십 좋아 따르는 후배가 많고 공부도 잘해 전액장학금을 받는다고 말이다. 며칠 후 전화를 걸어 집 가는 방향도 같으니 만났던 튀김집에서 보자고 했다. 흔쾌히 허락했다. 어찌나 떨리는지 튀김가루를 뒤집 쓴 김말이당면과 콜라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P가 “앞으로 집 가는 방향도 같은데 자주 보자”라는 답했다. 그 후로 P와 사귀게 됐다. 거의 4년 동안 사랑. 그리고 헤어짐. 나쁜 감정으로 헤어지지 않아 고스란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지금도 되새김질한다.
나중 안 사실이지만 P는 튀김 마니아(?). 특히 고구마튀김과 오징어 튀김을 좋아했다. 나도 어느덧 P가 좋아했던 튀김만이 아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지금도 튀김은 P가 떠난 빈자리를 채워주다가 P와 함께 했던 과거의 기억 속으로 데려다주는 징검다리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