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쓰나미가 주는 유익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이웬 카메론이 뇌에 충격을 가하는 쇼크요법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그 목적은 정신질환자에게 '새로운 인성'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충격을 주면 명확한 사고를 하기가 힘들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물론 치명적인 부작용이 더 많았다. 이와 관련된 실례가 있었다. 스리랑카의 한 해변마을에 호텔개발업자들이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싶었자. 하지만 어민들은 삶의 터전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 개발업자들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그랬다. 2004년 12월 평온했던 해변마을에 살인적인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이른바 '쓰나미(지진해일))'이다. 20분 만에 4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해안선의 4분의 3 이상이 종적을 감췄다. 그 결과는 주민들이 전에 주민투표에서 거부했던 개발업자들의 제안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위 사례들이 사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가 있지만 사례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난의 쓰나미가 밀려오기 전까지 반응하지 않는다. 엄청 한가하기 그지 없다. 두 눈을 뜨고 보기가 민망할 정도다. 준비는 하나도 돼 있지 않다. 계속 사람을 통해 인생의 쓰나미 신호가 보내온다. 하지만 교만한 인간은 눈과 귀를 닫은 채로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고집불통이다.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 내 안에 마이웨이 본능으로 계속 간다. 누군가 뒤에서 계속 뒤통수 조심하라고 경고를 날린다. 잘못된 방식을 계속 되풀이한다. 그러다가 막상 고난의 쓰나미가 닥치면 어쩔 줄 몰라한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원망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참 딱하다. 상황과 환경에 함정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한다. 그래서 이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바로 하나님(종교없는 분들에겐 절대자, 조물주, 타 종교 부처, 알라)의 도우심이다. 그 도움은 역시 책, 전문가, 본인이 종교 등을 말한다. 그런 도우심 속에 과거에 없던 급격한 자기 성찰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주로 침묵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와 고난의 쓰나미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발끝을 부딪혀서 찧거나 발목이 삐면 고통을 통해 뇌에서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알려 주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환경과 사람을 탓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부족함(연약함)을 보게 된다. 나름 성숙하다는 사람들은 겸손하게 눈을 감고 깊은 본인 성찰의 시간을 가진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바로 엎드린다. 기도한다는 것이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나란 사람은 전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믿지 말아야 한다. 자기 마음과 자기 건강. 자기 마음만큼 변화무쌍한 게 없다. 또한 자기 건강을 자신했다간 큰 코를 다칠 수 있다.
이러하듯 고난은 자기 자신의 깨어짐을 맛보게 된다. 고난은 우리가 묵상하는 대상까지 바꿔놓는다. 나 자신에 관한 묵상하거나 문제에 관한 묵상하는 대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묵상하는 사람이 된다. 고난 속에서 자신과 환경을 묵상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나 자신을 보면 낙심되지만 하나님의 손실을 의지하고 나를 바라볼 경우 나에게도 소망이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고통의 터널을 지는 사람에게 부탁한다. 시편 23편 암송하라고 말이다. 특히 시편23편 4절을 기억하라. "내가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 23:4)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라고 한다. 내가 잘못되면 위험하다라는 신호가 크게 울려야 내가 산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내 자신의 문제로 인한 고통이든 사회적 문제로 인한 고통이든 그 고통을 내 생각을 먼저 교정하는 생각을 가지는 계기를 가졌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이 내 영혼을 파멸하는 도구로 쓰이는 엄청난 비극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하는데 그걸 만든 것 역시 축복으로 바꾸는 것도 내 노력과 누군가 도우심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